The Pensieve
카이스트, 4월 7일
소리 | 2011/04/09 03:25
또 하나의 카이스트 학생이 세상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아침 뉴스에서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안타깝고 참담한 마음, 차마 표현할 길 없다. 떠나간 이들에게 이제 어떤 말로 위로를 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을 사랑하던 많은 이들의 애통함은 또 어떻게 보듬을 수 있을 것인가. 아아, 내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다. 온 몸이 물에 젖은 듯 무겁고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려 슬프고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올해 들어 벌써 네 번째 학생의 자살, 이 슬픔이 나만의 것일 리 없다. 카이스트를 걱정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카이스트 개교 이래 최대 위기, 무리한 경쟁의 비극, 서남표식 개혁 포기... 와 같은 무거운 제목을 달고 학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카이스트 괴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카이스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는 위기의식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가시적인 현상만 두고 펼치는 일반론에는 한계가 있다. 이공계 대학인 카이스트의 실태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여론 형성에 책임이 있는 주요 언론들도 예외가 아니다. 무작정 학교에 방문해서 길 가는 학생에게 단답형의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기사화하는 방식으로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수 없다.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카이스트 구성원 개개인이 이번 사건의 충격에서 헤어나오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한 친구는 "결코 제정신일 수 없었던 미친 세상에서, 그 긴 시간 동안 나 혼자 너무 멀쩡했던 것 같아서 징그럽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매듭이 어디서부터 엉켜 있었는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내 일 아니라는 식으로 바라만 보아도 안 될 것이요, 이 순간의 분노를 학교 측에 터뜨리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 놓으라 외쳐서도 안 될 일이다. 서남표 총장에게 원색적인 비난이 집중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고민 끝에 글을 쓴다. 종일 앓던 끝에 글을 쓴다. 규탄과 원성, 원인 색출의 아비규환 속에 어리석은 목소리 하나 더 얹는 꼴이 될까 두렵다. 말끝이 왜곡되고 다른 의미가 덧씌워져 오해될까 두렵다. 그러나 문제를 알면서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이겠기에. 한 명의 절망이나마 막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보람된 일이겠기에. 나는 카이스트의 변화하는 학부 교육 과정을 경험하고, 계속 공부하기 위해 얼마 전 대학원에 진학한 졸업생이다.

* * *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점들 중 가장 부각되고 있는 것은 학점에 따라 차등 부과되는, 일명 "징벌적 등록금"이다. 재수강 횟수 제한과 재수강비, 연차 초과자 (8학기를 초과해서 재학중인 학생) 에 대한 등록금 전액 부과제 등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돈으로 학생을 압박하는 잔인한 처사라는 비난이 다시 한 번 몰리자, 오늘 (4월 7일) 학교측은 징벌적 등록금 부과제를 전면 폐지한다고 밝혔다.

징벌적 등록금제는 진작 폐지되었어야 했다. 그 동안 자신을 자랑거리로 여겨 왔을 부모에게 성적을 못 받았다며 손을 벌려야 하는 자존심의 상처는, 이미 많은 인터뷰를 통해 토로되었으니 더 말하지 않기로 하자. 징벌적 등록금제가 나빴던 첫 번째 이유는 평균 이하가 곧 실패라는 암묵적 전제에 있었다. 차등 등록금의 기준인 평점 3.0은 평어로 B0, 그러니까 정규분포에서 한가운데라 할 수 있다. 징벌적 등록금제가 없어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학생들의 실패에 벌금을 매긴다는 발상 자체에 있다. 낮은 학점이 언제나 실패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누가 그 실패에 벌금을 매길 수 있단 말인가! 내신 1등급을 받던 고등학교 시절을 굳이 회상하지 않더라도, 성적표에 찍힌 C나 D는 누구에게나 가혹한 것을.

징벌적 등록금제는 완전히 실패했다. 학생들의 등골을 휘게 해서? 부모님 앞에 구차해지게 만들어서? 아니다. 학생들에게 공부할 이유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등록금의 압박은 학생들에게 학업에 대한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했는지 몰라도, 너무나 현실적인 "이유"를 눈앞에 들이댐으로써 주체적 학구열을 빼앗아 갔다. 공부할 이유는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공부에 매이지 말고 다른 일에서 다른 이유를 찾으러 세상에 나가야 하는 것이다. 공부할 이유도, 공부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찾게 놓아두지 않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열정이 불타오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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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동기를 분석하고 단순화해서 "과학적으로"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지 않기로 하자. 그것은 괴로워했을 영혼에 대한 무형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자살은 병리적 현상이며 어느 이유로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올 들어 벌써 네 명의 학생이 자살을 택했으며 그 중 세 명이 1, 2학년이었다는 것은 적어도, 학교 전반적으로 비관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는 이 낙담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점을 말하려 한다. 먼저, 카이스트에서 지난 몇 년간 과학고등학교 출신이 아닌 신입생의 비중을 점차적으로 늘렸다는 점을 짚어 보자. 일반계 고등학교나 외국어고등학교,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학생의 수는 이제 전체 학생 중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 이전에는 카이스트 신입생의 대부분이 과학고등학교 출신이었고, 비슷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스트 1학년 교육 과정은 자연스럽게 과학고등학교의 연장선에서 결정되었다. 그 시절 일반계고에서 카이스트에 진학한 학생들은 일종의 도전자가 된 듯한 마음가짐으로 학교에 들어왔고, 남들보다 치열하게 공부했으며, 많은 경우 오히려 과학고 출신 학생들을 따라잡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어디에나 강한 의지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대부분 성공한다. 스스로 비주류임을 의식하는 데서 나오는 독기는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성공 케이스들을 보고, 가능성 있는 일반계 학생들을 대거 선발한다. 이 학생들이 입학과 동시에 카이스트의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학에 집중된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카이스트 수업을 이해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과학 공부에 들인 시간이 다른데 같은 실력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런 경우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딱 하나의 지식이 부족해서 수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으니, 이 수업의 수준과 내 지식 수준 사이에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니 불안감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학교가 우리에게 무리한 것을 시키고 있다는 반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어디서부터 채워야 할지 모르는 지식의 구멍, 한번 시작된 불안감은 전염병처럼, 개인의 상황을 불문하고 퍼진다. 격차를 실제로 느끼지 않는 학생들까지도 침체된 분위기를 공유한다. 더군다나 같은 입장에 놓인 학생이 전체의 몇 십 퍼센트에 달하게 되면 이것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의 지식만 가지고 있을 걸 알면서 학생을 데려왔으니, 학교에서 그 간극을 채워 주어야 한다. 입학 후 첫 1년이나 한 학기 동안 선택적인 "준비 과정"을 거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학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정 정도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수능의 피곤함에 뒤이어 괴물처럼 나타난 또 다른 치열함에 적응할 시간도 생길 것이다. "준비 과정"은 연차 초과의 기준인 8학기에서 제해 주어야 한다. 등록금을 약간 더 내더라도 말이다. 학생들이 추가적인 비용을 부담하며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듯, "준비 과정"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 빨리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보통 건축학과 학부 과정은 5년이라고 들었다. 의대에는 예과와 본과가 따로 있다. 과학 공부에도 "예과"가 필요하다. 감당할 만한 도전과 성취를 연습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준비가 되었으니, 열심히 하기만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어야 한다. 마법처럼 학업 분위기가 바뀔 것이라 확신한다.

"준비 과정"은 과학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에게도 필요할 수 있다. 영어 강의의 기조를 바람직하게 유지하려면 말이다. 아무리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영어라지만, 막상 실제 상황에서 사용해 본 적은 없다. 외국어로 수업을 듣고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왕 영어를 학교 공용어로 쓰기로 했다면 학생들이 영어 강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영어 구사가 일정 수준으로 편해질 때까지 귀찮게, 무료로, 계속 가르쳐야 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학생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영어 강의 시행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논문 작성이나 학회 발표 등 과학계에서의 활동은 대부분 국제 공용어인 영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순차적으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현역 과학인이 되었을 때 영어를 잘 구사하게 하기 위해 연습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점진적인 발전의 단계를 고려해 주어야 한다.

영어 강의의 목적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카이스트에서의 영어 강의는, 훌륭한 과학인으로 활동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한 가지 능력 (공용어 구사) 을 발달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범람하는 글로벌화 기류에 휩쓸려, 세계적인 일류 대학들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사대주의적 이유를 대어서는 안 된다. 외국인 학생과 영어 강의와의 관계도 확실히 해야 한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영어 강의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 부가적인 효과로 외국인 학생도 입학시킬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외국인 학생을 받기 위해 영어 강의를 한다고 말하면, 주객이 바뀌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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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된 점수, 상대적인 순위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앞을 보고 달려야 했던 시기는 지났다. 사실 학교에서는 외국인 학생을 받기 위해 영어 강의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외국인 학생을 받은 이유는 세계적인 일류 대학들처럼 국제화된 학교가 되기 위해서였다. 국제화된 학교가 되어 좋은 점은 더 유명해지고, 더 명성이 높아지고, 더 큰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학교측에서 초기에 제시한 (적어도 나는 그렇게 전해 들었다) 논리였다.

시작이 그랬을지라도, 국제화 정책의 구체적 내용에는 찬성하는 바이다. 다만 우리의 철학과 소신을 명확히 하자. 국제화된 "기준"에 우리를 맞추려 한다면 아직 우리는 덜 국제화되었다 할 수 있다. 우리의 방식이 어떻든 그 또한 국제적 지형도를 이루는 한 개성이다. 필요한 것은 배워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외국 대학들이 그랬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한다는 얘기는 그만두자.

평가와 상대적 순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할 곳은 거기 말고도 또 있다. 학점, 강의평가, 국내 대학 순위, 세계 이공계 대학 순위, 등등. 다른 누군가가 매겨 준 점수로 나를 계량하려고 하지 말자. 학점을 받을 때마다 우리 모두 느꼈다시피, 그게 누구든 내 능력을 다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평가와 순위는 경쟁을 북돋아 주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경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경쟁은 패자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 아닌, 모두의 발전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말을 학교에게 하고 있다.

* * *


사회적 성공을 정의하는 서로 다른 개념들은 전혀 다른 가치관과 판이한 문화를 형성한다. 미국의 경우 성공의 잣대는 절대적으로 부(富)이다. 대학에 들어가지 않아도, 입학했다가 낙제해도, 중퇴해도, 대학에서 학점이 좀 좋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그 후에 어떻게든 부를 얻으면 성공한 인생이다. 대기업에 입사하든 구멍가게를 차리든 상관없다.

프랑스는 제도적으로 엘리트주의를 추구하는 보기 드문 교육 제도를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면 "에콜(불어로 학교)"이라고 불리는 일반 대학에 가거나, "그랑제콜(최고의 학교)"이라고 불리는 상위 대학에 갈 수 있다. 물론 대학에 가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고등학교에서도 학업 대신 기술 교육이나 직업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랑제콜"에 가려면 일단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서 최상위 성적을 받은 뒤 2년의 그랑제콜 준비과정을 거쳐야 한다. 준비과정 중 여러 번의 시험을 통해 최종 선발을 하는데, 한 번 탈락하면 재시험은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각 분야 엘리트, 즉 학자, 경영인, 정치인, 행정인 등은 대부분 그랑제콜 출신이다. 많은 경우 그랑제콜 출신 부모를 가진 학생이 다시 그랑제콜에 지원하므로, 우리 생각 같아서는 모든 분야에서 학벌로 나뉘어지는 일종의 계급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제도가 가능한 이유는 단순하다. 구성원 대다수가 "사회 지도층"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에게는 뿌리 깊은 입신양명 사상이 있다. 요즘 돈이 최고라고는 하지만, 사업을 해서 성공한 대기업 회장과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노교수가 있다면 대부분 교수 쪽에 더 존경의 뜻을 보인다.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이 여전히 최고의 명예이다. 수준별 수업을 하면 더 낮은 반에 있는 학생이 열등감을 느낀다. 누구나 공부를 가장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랑제콜"처럼 차별화된 학제가 민주화와 평등화를 견뎌낼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가끔 신문기사를 통해 "공부 말고 다른 능력을" 살려 성공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는 능력을 공부와 공부 아닌 것으로 양분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왜"를 따지지 말자.

그만큼 우리에게는 공부가 중요하다. 교육열도 대단하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평생 공부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배려되어야 하는 학생들의 정서가 있다. 일단 카이스트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얼마나 강한 자존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모두가 한 방향을 보고 있다는 매우 특수한 상황 때문에 "가장 훌륭한 학생"이라는 이상한 개념이 생기고, 그 선두에서 늘 달려온 것이 카이스트의 신입생들인 것이다. 20년 평생 성공 가도를 달리던 중 벽처럼 찾아와 부딪치는 열등감, 그 벽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본인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약하게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회가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충격으로부터 강해질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공간을 1차원(오직 공부)에서 다차원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자연스럽게 차근차근 바뀌어야 한다. 단시간에 끝날 일은 아닐 것이다.

중등 교육의 특수성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 동안 모두의 목표는 공부이다. 그 종점은 수능이다. 수능은 대학 입학을 위한 것, 결국 또 다른 공부를 위해 모두가 잠 못 자고 못 놀고 공부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공상은 금기이다. 결국 십대 후반에 겪어야 할 정신적 혼란기와 성숙기를 온전히 겪지 못한다. 뭘 하고 싶은지 꿈도 찾지 못한다. 대학생은 더 이상 성숙한 어른이 아니라, 때 늦은 질풍노도의 시절을 방황하는 소년 소녀이다. 대학에 와서도 방황한다고 혀를 찰 일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모범적으로" 보낼수록 정신적 사춘기는 늦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실이므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적어도 그 미성숙함 자체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한참 감수성 예민한 고등학교 시절엔 공부하느라 바빠서 어디 놀러 나가지도 못한다. 모든 욕구들이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미명하에 오랫동안 억눌러졌다가 대학 입학과 함께 폭발한다.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해서 수능을 본다. 그러면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가? 절대 아니다. 대학에 들어갈 때는 놀러 간다. 그 동안 못 놀아서 맺혔던 한을 풀러 간다. 그래서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오기도 하고 동아리 활동에 미치기도 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대학생들은 첫 한 해를 그렇게 보내며 "한을 풀고" 충분히 방황하고 실패를 겪어 본 다음, 조금씩 무얼 하고 싶은지를 깨달으며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한다. 요즘 애들 정신 못 차린다고 핀잔 줄 일이 아니다. 사회가 허락하는 한 가장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카이스트에서는 어떤가? 방탕한 1학년은 허락되지 않는다. 입학과 동시에 치열한 삶에 내던져진다. 아직 머리도 가슴도 뜨거운데 그건 언제 식히란 말인가? 맺힌 걸 풀지 않고 말 잘 들으면 나중에 병이 나고, "자연스럽게" 살다 보면 어느새 낙오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학업에의 집중과 치열함은 분명 과학도의 덕목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막 탈출한 "아이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방황과 낭만을 허용해 줄 수 있는 학사제도가 절실하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실시할 계획이라는 발표를 들었다. 하루빨리 시행하시길 바란다. 상담 자원도 확충할 것이라 들었다. 그것도 충실하게 해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문제를 발견하기 위하여" 심리 검사와 상담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도 지도교수제가 있지만, 특히 저학년 학생들에게는 마치 "담임선생님"처럼 조금 더 인간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일 주일에 한 번 지도교수와 만나야 하는 신입생의 "새내기세미나" 시스템을 강화하고 연장하자.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선배와 후배 사이의 소소한 교류와 자연스러운 "멘토링"이 어떻게 장려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자. 상급생 "멘토" 자원을 받고, 한 학기 후 그 멘토와 고민상담을 해 본 후배 "멘티"들에게 인기투표 등을 실시해 우수 멘토를 선정해서 재정적 지원을 하자. 예산 낭비가 아니다. 학생들과 심리적 배경 면에서 유리되어 있는 상담사를 하나 더 고용하느니, 그런 "인기 멘토" 선배들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훨씬 고효율 저비용이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학생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초부터 학생들의 마음이 건강할 수 있도록 건강한 학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 * *


학교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이론적인 정책을 강제 적용시켰다는 데 있다. 그러나 비난만 해서는 곤란하다. 당장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징벌적 등록금제와 같은 과도한 시도도 있었지만, 개혁 없이는 발전도 없다. 서남표 총장 부임 이래 카이스트는 현재진행형의 대 변혁을 겪는 중이다. 변화는 건강한 것이며 갈등 역시 그렇다. 중요한 것은 학교와 학생, 어느 쪽도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학교가 이제까지 취해 온 극단적인 입장은, 교훈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큰 극단적인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학교에서는 개혁을 추진하기에 앞서, 학생들의 성장 배경과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훨씬 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소통을 위한 합법적인 도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 몇 백 명 (정해진 숫자: 예를 들면 300명)의 청원을 받으면 전체 구성원 투표를 할 수 있게 하고, 투표의 결과 학생 중 3/4와 교수 중 3/4가 동의하면 어떤 규정이든 수정할 수 있도록 하자. 총장을 비롯한 운영위원회가 투표 결과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수정안을 제안해서 1회의 재투표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 될 것이다. 사실 이 과정을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울 것이며, 남용되기는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합리적인 제안에 대해서도, 전체 구성원의 3/4 (그것도 학생과 교수 각각에서 3/4) 의 동의를 얻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시도가 아마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방향을 제시하고 공감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가 통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정말로" 그만큼 전폭적인 공감을 얻은 사안이 있다면, 당연히 적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카이스트를 "더 좋은" 학교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학교와 학생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에게 더 다가서야 한다.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 문화와 정서를 존중해야 한다. 학생은 학교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 학교가 목표를 설정해 주고 지식을 넣어 줄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지혜를 찾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 학교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할 바에는 차라리 뛰쳐나가 버릴 수 있는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갑자기 생겨난 문제가 없듯, 단번에 해결되는 문제도 없다. 모두가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조금씩 바꾸어 나가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의 상황에 가장 잘 맞는 방식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과 확신을 갖는 것이다.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 *


1,2학년 학생들의 절망과 극단적 선택을 볼 때면 특히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밀어오는 피스톤을 잠시 멈추고 학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바깥 세상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랬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시작인데, 지금 빠르고 늦은 것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더라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의 다른 부분이 얼마나 넓은지 알았더라면!

쓸모 없는 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존재가 흔들린다고 느껴지는 순간, 삶이 부질없어 보이는 순간, 어디든 밖으로 나가 보기를 권한다. 햇빛을 받고, 두 발로 걷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길 바란다. 평소에 가지 않던 곳에 가 보고, 얼핏 보기에 대단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길 바란다. 가능하면 아주 현실적인 삶의 현장을 지나가 보길 바란다. 색을 잃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의미를 찾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색조의 삶을 살고 있는지 보라. 그 삶이 얼마나 대단하며 아름다운지 보라. 직접 보아야 한다. 현실과 연결되었을 때 우리는 희망을 잃을 수 없다. 스스로 놓아 버릴 수는 더욱이 없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 루디야드 키플링의 시 <만일>을 노래하면서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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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0 07:34 R X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종욱 2011/04/10 10:38 R X
혹시 아라에 있던 이 글 읽어봤는지.. 점진적으로 영어교육을 도입하는건 구성원이 계속 바뀌는 대학의 특성상 불가능하다고 봐-

http://babocherub.egloos.com/5509732


2011/04/10 13:30 R X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Bintz 2011/04/10 15:06 R X
한국의 과학자 공학자들은 '한글로 지식을 남기는 일'에 열정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로 작성된 지식이 영어로 작성된 것들을 뛰어넘을 때가 와야 후손들이 (한국 땅에서!) 영어 때문에 죽자살자 하지 않죠.. ※ 한국에서 영어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 나쁜 심성을 가진 사람들도 많고 : http://blackoutmirror.blogspot.com

저는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현재 인력운송수단(자전거, 카약)을 디자인하는데 ①가치 있는 지식은 영문검색으로 찾아야 하고 ②국문검색으로 찾아진 '신기술' '세계최초'란 것들은 하나같이 거짓으로 분석되는 현실이 한탄스럽습니다.

여기 글 잘 쓰시는 블로그 쥔장님을 찾아오시는 분들도 과학기술자들이실텐데, 자신이 공부하는 분야에 대해서도 한글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서로 공개적 온라인 토론도 활발히 해서 한글의 가치를 나날이 높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저 스스로도 노력 중^^ : http://dynafeel.blog.me

서남표 총장의 발명 관련 글은 여기 있는데 http://dynafeel.blog.me/120123223897 너무 거칠게 썼습니다. 앞으로는 (글만이라도) 순한 사람 되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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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해서.. '모든 자살은 범인이 특정되지 못한 타살'이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Y'Joon 2011/04/11 22:40 R X
우리 후배에게, 못다핀 청춘에게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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