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바리데기
울림 |
2009/07/02 22:05
|
|
|
황석영, <바리데기>; 창작과비평사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혹은 잘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애써 바라보지 않고 있는?) 시대의 어두움을 직시하자니 마음이 텁텁했다. 나는 작가의 어린 시절 얘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김일성의 죽음이라던가 20세기의 끝 같은 이야기가 나오질 않는가. 책 속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을 제삼자의 시각에서만 보다가, 동시대임을 깨달으면서 갑자기 불편해졌다.
단순하리만치 직설적으로 옳고 그름,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을 비춰주어서 식상하다고 생각했다.
ㅡ식상하달 것이 아니라, 생각해 보면 그냥 세상이 그런 것이다. 다섯 살배기도 알 만한 것들: 미워하지 말라, 욕심내지 말라, 그 쉬운 생명의 말들을 듣지 못하는 건 인류의 구제받지 못할 어리석음일지도. 매일 그 말들로 밥을 해먹고 손을 씻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ㅡ이 마지막 말조차 진부하고 진부하지만 그래서 어째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세상에 선이 있고 악이 있기나 한지 나는 모르겠다. 도둑은 남의 물건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제 것을 가지려는 것이고, 테러는 남을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지키려는 것일 테고... 샹은 바리의 행복을 망치려던 게 아니라 저 살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나 더, 무당(샤머니즘)에 대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루어준 책은 처음 보았다. 나는 무당이니 영매니 하는 것들에 대해 많이 들어 익숙하면서도 상당한 편견/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리에 대해서는 모든 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갑작스러운 입장의 변화에 내 스스로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다시 보니 이 책은 샤머니즘과 이슬람, 내게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질적이던 두 개의 종교를 다루어준 것이구나. |
|
|
| 이 글의 관련글(트랙백) 주소 :: http://zheone.byus.net/room/trackback/331 |
|
|
|
|
|
백 년 동안의 고독
울림 |
2009/07/01 20:09
|
|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책의 처음 반쯤을 읽다 말고 지쳤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진행되는 통에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뭣에라도 홀린 듯이 어질어질했다. 그것에 익숙해질 즈음 마콘도의 운명에 진심으로 연민을 (우리 나라의 근대사가 문득 와서 겹친다) 느꼈지만, 그건 이내 잊어버렸고 대신 부엔디아 집안이 통째로 한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인격이 혼재하는 거대한 유기체 같았다. 중간 어디쯤부터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채 체념하고 이야기를 그냥 받아들였다. 다 읽고 나니 무엇이 그리 고독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고독했다.. 책 제목은 나의 복잡미묘한 독후감에 그나마 가닥을 잡아주는 가이드 역할이었지 싶다. 아니 그보다, 책 내용을 기억하는 상태로 자꾸만 책 제목을 음미하고 다시 음미하게 된다. 놀라운 제목이야. 노벨 문학상 작품이라는데 그럴 만 했다.
...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손수 영수증을 썼다. 그러고 나서 그는 성직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나누어주는 비스킷 한 조각과 레모네이드 한 잔을 받아 마시고, 쉬고 싶을 때 들어가 휴식을 취하라고 마련된 야전천막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셔츠를 벗고, 목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다가 오후 3시 15분에 권총을 꺼내 그의 주치의가 요오드를 적신 솜으로 그의 가슴에 그려준 동그라미를 쏘았다. 바로 그 순간 마콘도에서는, 우르슬라가 난로에 얹어둔 우유가 이상하게도 끓지를 않아 수상하게 생각하면서 주전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구더기가 가득 차 있었다.
"놈들이 우리 아우렐리아노를 죽였구나." 우르슬라가 소리쳤다.
고독을 느낄 때마다 하던 버릇대로 우르슬라는 마당으로 눈을 돌렸고, 그곳에는 죽을 때보다 훨씬 늙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비에 함빡 젖어서 쓸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 -200 |
|
|
| 이 글의 관련글(트랙백) 주소 :: http://zheone.byus.net/room/trackback/330 |
|
|
|
|
|
농담
울림 |
2009/07/01 19:49
|
|
|
밀란 쿤데라(1967), <농담>, 방미경 옮김; 민음사
내가 몇 페이지 전에 "마치 밀란 쿤데라처럼" 정서를 툭툭 건드리는 류의 글 얘기를 했는데, 그것 취소해야겠다. 누구도 밀란 쿤데라처럼 글을 쓰지 못한다. 다른 작가들의 글이 좋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저 이 사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재일 뿐이다. 적어도 한 문장 한 문장에 온 머리가 쿵쿵 울려대는 나에게는!
내 행동과 미소가 지식인(당시 또 하나의 유명한 경멸어) 냄새를 풍긴다고 동료들이 판단을 내렸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고 혁명 자체가, 시대 정신이 틀릴 수도 있으며, 나 하나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미소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곧 내 안에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하고 싶다.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 그러나 실제로 나는 누구였던가?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 이 마지막 얼굴이 진짜였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나는 위선자들처럼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얼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가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중 어느 것에도 꼭 들어맞질 않았고, 그저 그 얼굴들 뒤를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니고 있었다.)
-48~49
우리의 중대장 역시 아직 미완인 사람이었고, 어느 날 아침 자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무리 앞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에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전에 어디서 읽었거나 들었던 것이, 그와 유사한 상황을 위해 이미 만들어진 기성의 가면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어떤 배역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나는? 역할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이 역할 저 역할을 왔다갔다하던 끝에, 결국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어쩔 줄 모르다가 붙잡힌 것이었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에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을 하고,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이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나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흉내내는 열정이나 간단하게 맡아버린 역할들은 처참하돌고 실제적인 현실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129~130 |
|
|
| 이 글의 관련글(트랙백) 주소 :: http://zheone.byus.net/room/trackback/329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