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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5 - 종합편
소리 | 2010/02/08 22:31
지금 생각하니 그 문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시험이 다가오니까 침대머리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ㅋ-ㄴ--ㄴ-ㅋ-… 따위를 읽고 있었다. 문득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면 거기엔 당연히 기숙사 방문(흰색 페인트에 초록색 조금을 섞어서 칠해 놓은 철문이다)이 보였다. 흰색 페인트에 초록색 조금을 섞어서 칠한 문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제야 알아차렸단 말인가?

검은 잉크의 형상이 추상적 개념의 구조로 연결되는 두뇌 속 기작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정보는 인식되지도 않은 채 넘어가고는 한다. 그럴 때 나의 모든 것은 그 잉크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단어가 생소하고 독립적인 시각적 패턴의 집합 (c-a-n-o-n-i-c-a-l- -…) 혹은 입천장에서 상상되는 어떤 발음의 촉각으로 (ㅋ-ㄴ--ㄴ-ㅋ-…(-ㄹ)) 느껴지는 어느 순간이 있는데…….
이유도 없고 계기도 없이 나는 갑자기 나의 세상으로부터 딸깍 하고 튕겨나오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책 속 단어와 의미만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개념의 모든 연결부분이 당위성을 잃고 멋적게 겉돈다.

그러니까 마치 서로 다른 레이어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슥 문지르면 세상은 나와는 다른 공간에서 지워질 것이었다. 아니면 세상은 그대로 있고 나만 지워질지도 몰랐다.

눈을 들면 흰색 페인트에 초록색 조금을 섞어 칠한 문이 거기에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날 내가 보아 버린 것은 고개를 들고 나서 문이 거기에 있기까지의 짧은 시간차였다. 세상과 나는 헛돌고 있었다. 미세했지만 분명히 그랬다. 바닥에 발을 대어 보았다. 이번에는 바닥에 발이 닿는 것과 발에 바닥이 느껴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책을 읽다 시선을 돌릴 때, 몸으로 인지하는 이곳이 아닌 어느 다른 영역에 나는 가 있다가 문득 돌아오는 것이었다. 두 개의 세계가 가볍게 스쳐 철커덩 맞붙으면 그 충격으로 시간이 미세하게 흔들려 모든 것이 한순간 뒤섞였다. 시간의 어느 구간도 차지하지 않는 뒤섞임을 나는 그냥 알 수가 있었는데, 그 후의 공간은 그 전의 것과 확실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 이쪽으로 넘어온 이상 그 둘을 다시 맞붙이기란 불가능하다. 그때까지 가상으로만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혈관을 따라 갑자기 진짜 피가 흐르고, 거기 있기로 했던 공기는 이제 진짜로 내 코를 타고 폐까지 순식간에 들어온다ㅡ.
왜인지 나는 원래 하던 것처럼 두 세계 사이를 매끈하게 넘어오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눈을 들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덜컹 하고 끝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걸 놓치고 인식의 공간 사이에 잠시 미아로 남겨진 나는, 어떻게 해야 넘어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넘어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불안했던 것이다. 그럴 땐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짧은 시간을 사이에 두고 어느 공간으론가 덜컥 건너와지곤 했는데, 여기가 맞는 곳인지에 대해서는 도통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의심에 차서 책상 위에 손가락을 굴려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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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소리 | 2010/02/03 15:56
아, 모두들 모순적인 나를 비웃도록.. 책을 읽고 일기를 쓰다가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데, 이걸 또 제꺽 블로그에 옮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공개해서 타인의 시선에 노출시켜야 만족을 얻는 오늘날의 문화. 나도 거기에 길들여져 가는 것이겠지. 조소하는 대뇌를 뒤로 하고 키보드를 또 두드리고 있는 손가락이 참담하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종이에 펜으로 쓰는 글이 부담스럽다. 한 번 쓰면 뭘 끼워넣을 수도 다시 고칠 수도 없다는 것이 겁이 난다. 또 종이에 적혀 내려가는 글자의 속도는 자판을 두드려대는 손가락보다 너무 느려서, 내가 뱉어놓은 말들을 천천히 대면하는 일이 여간 민망하지 않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민망한 글줄들을 웹 페이지에다가는 잘도 덕지덕지 붙여넣고 있었던 것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대중의 밀실이고, 블로그는 개인의 광장이다" 라고 내가 자부심 섞인 말투로 가끔 말하곤 했다. 무엇에 대한 자부심? 남들이 싸이월드 홈피의 다이어리에 그러듯 얕디 얕은 즉각적인 것들을 아무런 거름장치 없이 뱉어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네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두뇌에 전극을 달아서 뇌파를 오실로스코프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색이나 숙고를 거치지 않고 말초 신경에 손가락을 달아 무조건 반사하듯 이진법의 데이터로 옮기는 짓을 매일 한다. 버튼을 누르면 먹이를 얻는 쥐처럼,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정신적 보상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해서 그 생각들이 영원불멸의 수명을 얻게 되었다는 양! 그렇게 영원히 살아남는다 해서 그게 다 무엇일지?




동풍이 불면 동쪽으로 가야지
하루 | 2010/02/02 16:38
고등학교 1학년 때 했던 미세유체역학 연구에서 비눗물에 유성의 액체방울을 띄워 그 운동을 보았었다. 작은 액체방울은 표면장력의 팽팽한 균형 속에 매우 불안정한 정지상태에 있다가, 어떤 미세한 외부요인에 의해 균형이 깨지는 순간 한쪽으로 튕겨나간다.



개강 첫 주 강의 쇼핑을 다니고 있다. 졸업 전 마지막 학기라니 시원섭섭하다. (아,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무언가의 시작 역시 다른 모든 종류의 시작들과 마찬가지로 풋풋하고 설레는 일임이 분명하다.
'만약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건 인성 교육 프로그램의 진부한 물음인데, 지금 강의를 고르는 것도 비슷한 기분이다. 개강 과목 목록에 빼곡하게 들어찬 실라버스들이 나에게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묻는 것이다. 자 마지막 기회야, 뭘 들을래?

늘 그렇듯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모두가 첫 주에 바쁘게 돌아다니며 하는 일은 그것들 중 최상의 조합을 찾아내는 것이다. 난 이번에 논술과 교양과목 하나를 포함해서 6학점만 넘겨 들으면 되는 데다가 추가신청에서도 가장 우선 순위라서, 좀은 사치스러운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시대순으로 구분된 미술사 시리즈가 세 과목 있다. 지난 학기에 중간 것을 듣고 좋았기 때문에 이번에 열리는 나머지 두 개를 들으면서 미술사 공부를 해보겠다는 바람직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듣고 싶은 전공과목이 하나 있으니까 합하면 12학점인데ㅡ 3학점짜리 미술사 하나 떼어 버리고 한껏 여유로운 학기를 보낼 수도 있다. 두 개 다 들을까, 말까, 한 시와 두 시 반에 각각 시작하는 미술사 강의들에 막 들어갔다 나온 참이었고, 다음 목적지는 네 시에 시작하는 논술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 남는 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캠퍼스 커피숍에서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편한 창가자리를 혼자 차지한 채 책을 읽는 중이었다. 개강 첫 주에는 이래저래 자투리시간이 많이 남게 마련이라 중간중간 읽을 심산으로 들고 나간 장영희 교수님의 문학 에세이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었다.
그녀의 에세이를 읽으니 당장 도서관으로 뛰어들어가 그 책과 시들을 찾아 읽고 싶어졌다. 칼럼으로 연재할 때 편집인의 요구가 독자로 하여금 그런 마음이 들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는데, 적어도 내겐 성공한 셈이다. 그 짤막한 글들을 읽으면 갑자기 햇빛이 따뜻하고, 삶은 고귀하며 문학은 아름답다..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책들! 이 책들을 읽어야겠어. 멍청한 조별 발표 준비 따위로 쓰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당연한 듯 그렇게 정하고는 기분이 좋아져서 강의 쇼핑을 그만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크고 작은 결정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세상이라는 지형 위를 굴러가던 내가 높거나 낮은 어느 언덕 위에 아슬아슬하게 멈춰서 다음 갈 곳을 고민할 때면, 무심히 거기를 지나던 바람이 우연히도 나를 스쳐가는 것이다.

수면의 작은 요동이야 옆 실험실에서 누가 문을 벌컥 연다거나, 내가 좀 크게 숨을 쉰다거나, 아니면 방울을 떨어뜨리는 피펫의 끝을 너무 늦게 뗀다거나 해서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의 페트리 접시 안에서는, 그 요동이 아슬아슬 속박되어 있던 액체방울의 에너지를 터뜨려 그것의 삶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 주고는 했다. 산꼭대기에 멈춰 선 공이 어디로든 굴러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동풍이 불면 동쪽으로 가야지. 당분간 책을 읽어야겠다. 내 독서는 너무 편중되었네, 감상에 허세가 들었네, 이렇네 저렇네 따질 것 없이 그냥 무조건 많이 읽어야겠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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